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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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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유농업사 2021. 7. 26.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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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비텐베르크 성당의 입구에 95조 반박문 게시

이후 독일어판 성서를 편집하였고

구텡베르크의 인쇄술에 힘입어 빠른속도로 반박문은 퍼져 나갔다.

교회 세속화에 반기 종교개혁 불씨1999년 10월의 마지막날, 루터교회 세계연맹과 로마가톨릭 교회가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촉구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한다. 신성로마제국(지금의 독일) 변방의 한 수도사가 종교개혁의 선봉에 선 지 482년 만의 일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면죄부 비판 .1517년 10월31일 정오,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건다. 교회가 연옥에 있는 영혼까지 들먹이며 면죄부를 파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전임자의 저금, 자신의 수입, 그리고 다음 교황이 지불할 부채’까지 세 교황의 재산을 탕진할 정도로 성 베드로 성당의 개축에 열을 올렸다. 독일 마인츠 대주교는 교구 두 곳을 갖기 위해 교황청에 엄청난 상납금을 내야 했다. 설교자 테첼은 “금화를 면죄부 헌금함에 넣어 딸랑 하는 소리가 나면, 죽은 자의 영혼은 천국으로 향한다”는 말로 신자들을 현혹하면서 윗분들의 뜻에 부응하고 있었다.1483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루터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고향 집에 다녀오던 길에 번개가 바로 옆 수풀에 떨어지자 큰 충격을 받고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회에 들어간다. 면죄부 발행은 십자군 전쟁 때부터 행해지던 관습이었지만 비텐베르크 지역에서는 금지돼 있었다. 대학의 성서학 교수이기도 했던 루터가 면죄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자신에게 고해할 신자들이 이웃 마을에서 면죄부를 사고 그를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교황청의 세속화를 비판하는 논제를 교회 정문에 게시한 것도 학계의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소도시의 학문적 토론을 위해 던진 조그만 불씨는 의도와 달리 거대한 개혁운동으로 유럽 전체를 활활 태우게 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도 루터의 글을 순식간에 퍼뜨리는 데 한몫을 했다.이단으로 기소된 루터는 1521년 1월3일 공식 파문된다. 교황청의 추방명령 이후 루터는 그를 후원하는 지방 제후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 지내면서 독일어판 신약성서를 펴낸다. 이후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 제네바에서는 칼뱅이 일어나 각각 종교개혁운동을 주도한다.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에서는 그러나 신교도 구교도 승리하지 못했다. 증오와 분열을 뛰어넘는 것도 종교개혁운동이 남긴 하나의 과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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