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는 100년 길게는 1000년. 그 긴 세월 동안 저마다의 맛과 향, 이야기를 간직하고 신비의 물을 쏟아내고 있는 고마운 샘들이 있다. 올여름, 이 신비의 약수를 찾아 떠나보자. 약수가 지닌 기이한 전설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하다 보면 정말 약수의 신비한 효험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 모금으로 더위를 싹 가시게 해줄 약수와 주변의 볼거리, 먹을거리, 놀거리를 소개한다.
글·사진=윤서현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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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에 계곡물이 흐르는 화암약수.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약수 한 바가지 들이켜면 온몸이 상쾌해진다.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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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 화암약수
꿈에 용이 하늘로 … 그곳 파보니 쇳내 나는 탄산수
화암8경 중 제1경으로 꼽히는 화암약수. 정선아리랑도 ‘화암약수 좋다 하여 약수 뜨러 왔더니 물맛 좋고 경치 좋아 나는 못 돌아서겠네’라고 노래한다. 역시 약수터 진입로에서부터 그 빼어난 비경에 입을 다물 수 없다. 1913년 이 마을에 살던 문명무라는 이가 꿈에 청룡과 황룡이 서로 얽히어 빛을 발하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꿈이 하도 황홀해 이른 아침 두 용이 승천하던 구슬봉 밑을 찾아가 땅을 파자 붉은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그 맛이 오묘했다. 그렇게 화암약수는 발견되었다. 두 줄기 중 본 줄기에서 솟아오르는 샘물만 하루 1660L로 그때나 지금이나 물맛이나 용출량에 변함이 없다고 한다. “이 물을 마신 동네 사람들의 위장병, 눈병, 피부병이 없어지면서 약수로 유명해졌어요. 아직도 어르신들은 아이들에게 눈병, 피부병이 생기면 제일 먼저 여기 데려와서 씻깁니다.” 문명무의 후손이자 정선군 시설관리공단 소속 문용학(56)씨의 말이다. 화암약수는 산화철탄산수다. 바가지에 뜨니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온다. 혀가 짜릿하고 쇳내가 난다. 빈혈에 좋다니 숨 안 쉬고 한 바가지 더 마신다. 약수터 바로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손발을 담그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만큼 맑다.
약수터에서 차로 5분 거리에 화암동굴이 있다. 제4경인 이곳은 금광을 파던 중 발견된 종유굴과 금광갱도를 이어 조성한 테마형 동굴이다. 천연 종유동굴과 금광의 생생한 흔적이 아주 흥미롭다. 동굴 안에서 동양 최대의 유석폭포와 기기묘묘한 대형 석순, 석주들과 맞닥뜨리는 순간, 장엄하고도 황홀한 자연의 신비에 경탄을 넘어 오싹한 공포감마저 든다. 아니나 다를까, 여름이면 화암동굴 ‘공포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모든 조명이 꺼진 동굴 속을 손전등 하나 들고 걸어가는 코스라니 극한의 공포를 체험할 수 있겠다. 올해는 24일부터 8월 22일까지다.
강원도 양구 후곡약수
소가 마시고 설사 뚝, 주인이 마셔보니 짜릿짜릿
한반도의 정중앙, 강원도 양구. 이곳에는 소가 발견했다는 약수가 있다. 1880년께 양구군 동면 후곡리 대암산 일대에는 소를 방목하며 길렀다. 그중 설사병에 걸린 소가 있었다. 어느 날 소 주인은 다래덤불이 무성한 계곡에서 홀로 물을 먹고 있는 그 소를 발견하고는 끌어다 우사에 넣었다. 한데 다음 날부터 소의 설사가 멎었다. 주인이 기이하게 여겨 소가 마시던 샘물을 마셔보니 보통 물맛과는 다른 짜릿하고도 시원한 맛이었다. 그렇게 알려진 대암산 기슭, 낙엽송 숲에 둘러싸인 후곡약수는 두 개의 샘이 나란히 솟고 있다. 약수터 주변은 약수에 포함된 철 성분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다. 그 외에 불소, 탄산이온과 규산이온 등 다양한 미네랄 성분이 들어있다고 한다. 한 모금 입에 물자, 쇳내가 진동하고 탄산음료처럼 톡 쏜다. 정선의 화암약수보다 비린 맛이 더 강한 것 같다. “처음엔 마시긴 힘들죠. 하지만 자꾸 마시다보면 이 맛에 중독됩니다.” 후곡리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장 김경섭(42)씨는 먹을 게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 이 약수에 설탕이나 사카린을 타서 사이다처럼 마셨다고 한다. 이틀에 한 번씩 차로 10분을 달려온다는 송정이(44)씨는 “이 약수로 밥을 지으면 밥이 회청색을 띠면서 부드럽고 찰지다”고 한다.
약수터 근처 음식점에 저녁으로 닭백숙을 주문했다. 뒷마당에 놓아 기른 닭을 잡아 끓여주는 닭백숙은 상에 오르기까지 50여 분 걸린다. 약수터 앞에서 옹폭삼거리, 옹녀폭포, 광치 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지는 생태 탐방로는 3시간30분 거리. 오솔길을 따라 양구생태식물원까지 슬슬 산책을 갔다 오는 코스도 50분 이상이 소요된다. 미리 주문해 두지 못했다면 생태탐방로를 50분 정도 돌고 오면 좋다. 후곡약수와 엄나무를 넣어 끓인 닭백숙은 빛깔이 거무스름하고 국물은 고소하면서 담백하고 고기는 쫄깃했다.
충남 부여 고란약수
한 잔 마시면 3년 회춘한다는 개운하고 단 맛
낙화암 절벽 중턱에 자리잡은 고란사. 이 절 뒤편 바위틈에 백제 의자왕이 즐겨 마셨다는 약수가 있다. 물맛에 반한 의자왕은 매일 사람을 보내 받아오게 했는데, 고란사 약수터 암벽에만 자생하는 고란초 잎을 띄워 오게 해 진짜 고란약수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저 위 골탱이에 있는 게 고란초 같은데유.” 부여군 문화관광과 소속 최미선(46)씨가 약수터 위 바위 절벽 틈바구니를 가리킨다. 카메라의 줌을 당겨보니 가느다란 잎자루에 갸름한 잎사귀가 서너 개 달린 풀이 바위틈에 붙어 있다. 잎사귀 하나만 띄워도 약수에 독특한 향을 더하던 고란초는 공해와 남채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고 한다.
고란초는 줄었지만 고란약수는 여전하다.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방울이 모여 늘 일정한 양이 괴어 있다고 한다. 긴 국자로 깊은 바위틈에 괸 물을 떠 마시니 시원하고 개운하고 달다. 이때 최씨가 “맛 좋다고 많이 마시진 마슈. 한 잔 마실 때마다 3년 젊어지니께유”라고 말한다.
백제시대 이 마을에 살던 한 노부부는 늙도록 자식이 없어 걱정이었다. 어느 날 할머니는 도사로부터 놀라운 효험을 지닌 약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남편의 회춘을 위해 약수를 마시고 오라 한다. 남편은 날이 밝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을 찾아 약수터에 온 할머니는 믿지 못할 광경을 본다. 웬 갓난아기가 남편의 옷을 입은 채 울고 있었던 것. 할머니는 한 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도사의 말을 깜빡 잊고 할아버지에게 전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이 아기는 후에 백제를 위해 큰 공을 세워 좌평벼슬까지 올랐다고 한다.
고란사까지 걸어 올라가는데 부소산성 구문에서는 40분, 새로 만든 정문에서는 한 시간 남짓 걸린다. 긴 돌계단으로 내려가 고란약수를 마시고 절을 돌아본다. 청아한 종소리로 부여 8경으로 꼽히는 고란사 종이며 벽화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다. 다시 계단을 올라 되돌아갈 자신이 없다면 절 앞에서 유람선을 타면 된다.
전남 구례 당몰샘
전국서 가장 무겁다는 물, 장수마을 만들었나
대부분의 샘이 깊은 산중에 있는 것과는 달리 ‘千年古里 甘露靈泉’라는 당몰샘은 300년 된 고택 쌍산재 바깥마당, 길가에 있다. 그러나 샘물바닥의 돌에는 이끼 하나 끼지 않았고 물은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하다. “아따, 허벌나게 시원하구먼.” 오토바이를 타고 온 동네 어르신이 샘물 한 바가지를 들이켜고 자랑을 늘어놓으신다. “이 당몰샘이 우리 마을 장수 비결이오. 지리산 약초 뿌리가 녹아 흘러드는 물이랑게.”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은 예부터 장수마을로 유명하다. 올해 6월 말 기준으로 총 주민 223명 중 고희를 넘긴 노인이 30명, 이 중 팔순이 지난 분은 13명이다.
쌍산재에서 6대째 살고 있는 오경영(46)씨에 따르면 본래 상사마을은 해주 오씨 문양공파 집성촌이다. 그런 마을에 의성 김씨가 들어오게 된 데에도 당몰샘이 관련있다고 한다. 조선 말, 의성 김씨 선조가 물 좋은 곳을 찾아 전국을 다니며 약저울에 샘물을 달아보았더니 당몰샘의 물이 가장 무거웠다고 한다. 그는 바로 이 마을에 정착했고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만큼 광물질이 많이 함유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한 모양이다.
오씨는 한옥 체험을 위해 5년 전부터 쌍산재의 빗장을 열었다. 300년이 넘었지만 주인의 손길이 곳곳에 느껴지는 아름다운 고택의 오래된 정원, 뒤뜰의 드넓은 텃밭, 서당에서 영벽문이라 하는 후문으로 나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저수지, 거기에 천상의 향인가 싶은 치자꽃향기, 깊은 대나무 숲…. 한옥의 아름다움, 그 운치와 격조에 감탄치 않을 수 없다. 상사마을 인근은 유난히 아름다운 고택이 많다. 깔끔하고 시원한 당몰샘으로 목을 축이고 고택의 툇마루에서 대나무 숲의 바람을 맞으면 올여름이 행복할 것 같다.
경북 청도 용천약수
승천한 용이 흘린 눈물, 달콤씁쓸한 약수로
깊은 산속 옹달샘은 바로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 구룡산 아래 자락에 위치한 용천약수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외롭다. 그러나 아름답다. 청도읍을 벗어나 운문댐으로 만들어진 운문호를 따라 30여 분을 굽이굽이 달리는 호반 드라이브 코스가 절경이다. 그 길이 끝날 때쯤 산속 좁은 길로 향한 ‘구룡산 용천약수’ 작은 표지판이 보인다. 그런데 한참을 달려도 민가 몇 채뿐이다. 그나마 문을 열어둔 채 비어 있고 개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들어섰나’ 싶은 순간 적막을 깨고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따라 가니 양지바른 언덕길가 거북이 석상의 입에서 연황색의 물이 졸졸 흘러나오고 있다.
“이게 용의 눈물이에요.” 약수터 아래 음식점 주인 황문석(54)씨가 용천약수에 얽힌 전설을 들려준다. “먼 옛날 구룡산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면서 지상과의 이별이 아쉬워 울었답니다. 그때 흘린 눈물 한 방울이 이곳에 떨어져 약수가 됐대요.” 샘에서 흘러넘친 물이 벌건 길을 만들어 놨을 만큼 용천약수에는 철분이 다량 함유됐다. 쇳내가 강하지만 끝에는 살짝 단맛이 느껴진다. 이 작은 산골 마을 16명의 주민에게 용천약수는 숙취해소제이고 소화제다. “과음하고 울렁울렁할 때 이 약수 두세 컵이면 정신이 퍼뜩 납니다. 밀가루 음식 먹으면 속 부대끼는 사람들 있죠? 이 물 먹으면 속이 편안해집니다.”
청도에서는 좋은 물에 몸도 담글 수 있다. 용천약수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용암온천은 지하 1008m 암반에서 뿜어져 나오는 천연광천온천수다. 온천 인근에 있는 와인터널도 볼거리다. 오랫동안 사용하지않던 남성현 터널이 2006년 와인숙성저장고 겸 카페로 다시 태어났다. 적벽돌과 화강암으로 지어진 분위기 있는 와인터널에서 맛보는 청도 특산품 감와인이 향기롭다.
그 외 이름난 약수
충북 청원│초정약수 세계 3대 광천수 중 하나. 이 물을 먹고 세종대왕은 눈병을, 세조는 피부병을 고쳤다고 한다.
강원도 양양│갈천약수 구룡령 계곡 너럭바위에서 솟아오른다. 철 성분 함유량이 높아 쇳물 맛이 강하다.
강원도 인제│필례약수 점봉산 서쪽 산자락에 있다. 이곳 주민들에 따르면 무좀, 비듬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경북 울릉│도동약수 ‘신비의 섬’ 울릉도의 약수. 강원도 약수들보다 톡 쏘는 맛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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