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화 수 (井華水)
정군수
한 마을에서 같은 날 두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남자와 여자아기였습니다. 그런데 여자아기는 딸 많은 집에서 태어났고, 남자아기는 아들 많은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삼신할미가 헛눈을 팔아서 바꾸어 났다고 하며 딸 많은 집을 위로하였습니다.
그 마을에서는 아기가 나면 어머니는 세이레까지 정화수 길어다 천지신명님께 치성을 드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두 어머니는 정성이 담긴 정화수를 길어다 신명님께 바치려고 물동이를 이고 새벽같이 우물로 나갔습니다. 두 집은 한 우물을 썼습니다. 이 마을에는 공동우물은 하나밖에 없고, 남의 집 우물은 새벽이라 사립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자아기 어머니는 우물에 가면 누가 자기보다 먼저 다녀간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두운 새벽이라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어도 무슨 흔적 같은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자식에 대한 정성이 부족한 것 같아 더 일찍 나갔지만 그런 느낌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안되겠다 싶어 첫닭이 울기를 기다려 곧바로 우물로 달려갔습니다. 과연 우물에는 누구도 다녀간 흔적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안도의 숨을 쉬고 물을 길어가지고 오는데, 저만치 어둠 속에서 물동이를 이고 그냥 뒤돌아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딸 넷에다 또 이번에 딸을 난 아기어머니임이 분명하였습니다. 남자아기 어머니는 무슨 죄나 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그 어머니는 정화수를 받쳐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천지신명께 치성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새벽 남자아기 어머니는 물동이를 이고 밭두렁을 두개를 건너고 고개를 넘어야하는 이웃마을 우물로 가서 물을 길어왔습니다. 이렇게 세이레가 될 때까지 남자아기 어머니는 산후의 힘든 몸으로 이웃마을 우물물을 길어다 받혀놓고 아기의 복을 빌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첫 딸을 낳자 시골에서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 어머니 이야기였습니다. 아직 한 번도 안하시던 말씀을 내가 자식을 두자 이렇게 들려주셨습니다. 마흔에 막둥이인 나를 낳고 힘든 몸으로 신새벽 물동이를 이고 밭두렁과 고개를 넘어 정화수를 길어다 치성을 드렸던 것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콱 막혔습니다. 여태껏 들려주시지 않던 이야기를 내가 자식을 두자 이렇게 들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어머니도 더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때 막혔던 가슴은 오래도록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 뒤 나는 아들을 낳았고,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를 스스로 묻는 동안에 조금씩 나의 가슴은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더는 몰라도 다른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지극히 소박하면서도 일상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두운 밤길 빈 물동이를 이고 돌아서 가던 딸 많은 집 어머니를 보고 먼 동네의 물을 길어오시던 어머니의 모습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자식들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나의 졸시 중에 ‘정화수(井華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사는 동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의 길을 안내해준 어머니의 영상을 그려낸 시입니다. 시는 부끄럽지만 어머니는 부끄럽지 않아 여기에 올립니다.
신새벽
당신은 물동이를 이고
어디쯤 가시나요
자식 길 밝으라고
은하수 한 그릇 받혀놓고
여윈 손을 모읍니다.
정화수에 뜬 별은
누구의 얼굴인가요
인생길 바르라고
새벽빛 한 사발 올려놓고
당신은 지금
어디서 빌고 계시나요.
--- 정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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