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 철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서울을 떠나 지리산을 찾는 발길은 늘 궁금함이 앞선다. 이번에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무슨 사연을 안고 살아오셨을까. 그속에서 지리산의 옛 숨결을 느끼며 잊혀져가는 아련한 기억을 들춰내 본다. 늘상 지리산행의 시작은 그 관문격인 남원으로부터 이어진다. 5월4일 늦은 밤에 도착한 남원시내는 뜻밖에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남원시내 중심가엔 청등 홍등이 집집마다 걸려 있고, 광한루 주변엔 엄청난 차량과 인파가 몰려 다니고 있었다. 69회째 맞이하는 춘향제 행사의 전야제가 광한루와 시내 일원에서 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지리산 북부관리사무소의 박갑동 소장을 만나 춘향제 전야제를 함께 볼 수 있었고 지리산의 환경문제에 관해 이야기도 나눴다. 자정이 넘어서까지 요천변 주위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대여섯 시간의 운전은 늘상 단잠을 자게 한다. 일찌감치 일어나 이 달의 목적지인 구례군 산동면으로 향했다. 지리산권이 겨울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서 제일 먼저 봄이 찾아오는 마을이 산동면이다. 매서운 찬바람이 가시면서 산동면의 몇 개 마을을 뒤덮은 산수유나무는 일제히 꽃망울을 터트려 이 마을을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인다. 때맞춰 엄청난 관광객이 몰려오고 사진작가들의 사냥터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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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로 유명한 상위 마을 산동면 중에서도 가장 산수유가 무성한 상위 마을을 찾아 올라갔다. 상위 마을은 게르마늄이 함유된 것으로 유명한 지리산온천이 위치한 구산 마을에서도 만복대 방향으로 3km 더 올라가야 한다. 95년 7월에 개장한 지리산 온천랜드는 지리산 산행 후 피로를 풀기에 좋고, 성삼재로 이어지는 천은사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남원에서 구례로 가다 밤재터널을 지나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에서 좌회전하면 연중무휴인 온천장에 이르게 된다. 만복대 능선이 올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위치한 상위 마을 입구에서 이 마을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다는 홍창기씨(洪昌基·55)를 만났다. 남양홍씨 문중공파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홍씨는 수백 년 전에 조상이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셨고, 마을 어귀에는 27대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고 한다. 7대 독자로서 18세 때 결혼하여 구자임(55) 아주머니와 사이에 2남 2녀를 낳았으나 전부 객지로 나가고 두 분만 살고 있다 한다. 일제 때 기억은 없고 해방 후엔 95호 정도가 사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당시에는 논밭이 적어 식량 구하기가 제일 어려웠다. 쑥을 넣어 만든 쑥밥과 소나무 껍질을 찧어 만든 송치밥, 칡을 찌어서 가라앉혀 밀가루를 넣어 먹는 수제비 등으로 연명했다. 6.25 전후해서는 산에 소나무가 무성했었으나 산동에 사는 사람이 아름드리 소나무를 엄청나게 벌목해 실어 날랐다. 벌목을 위해 휘발유차인 동목차가 상위 마을까지 올라 다녔다. 자유당 시절 진흙을 개서 칠한 흙담을 쌓아 집을 지었던 것이 새마을사업시 정부보조로 슬레이트로 올리면서 초가집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상위 마을에는 현재 22호에 100여 명이 살고 있으나 할아버지는 한 분도 안 계신다 한다. 6.25 전후 마을이 소각당하고 전쟁의 와중에서 젊은 사람들이 거의 다 죽어 지금은 50~70세 사이의 주민이 대부분이며, 할머니는 세 분이 계시나 두 분은 워낙 고령으로 대화가 불가능했고, 겨우 만나뵌 할머니 한 분은 방목하다가 도망간 흑염소를 찾으러 간다며 만복대쪽으로 올라가 버리셨다. 현재 이 마을은 민박 마을로 지정되어 고로쇠와 산수유, 방목 흑염소, 한봉, 토종닭 등을 키우는 관광휴양마을로 바뀌고 있었다. 특히 흑염소는 홍씨댁에서만 20여 마리를 기르고 있고, 마을 전체로는 300여 마리에 이른다. 토종닭도 많이 기르고 있었다. 우수 경칩 무렵에 나오는 고로쇠가 올해는 작년의 절반밖에 생산되지 않아 귀했고, 이른봄에 채취하는 초물은 1말에 5만 원을 받았으나 고로쇠액이 끝날 무렵에는 4만원을 받았다. 또한 집집마다 10여 통씩의 한봉을 길러 꿀을 따고 있다. 특히 전국적으로 유명한 산수유는 2월에 꽃이 피어 10월 중순에 열매를 맺게 되는데 채취한 열매는 집집마다 설치한 개인 건조장에서 말린 후 기계에다 넣어 씨를 빼고 필요한 껍질을 벗긴다. 산수유 껍질은 주로 외국으로 수출되어 염색원료로 쓰이나 국내에서는 한약재로 조금씩 팔려 나간다고 한다. 산수유는 꽃이 피었다가 질 때쯤 되서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는데 작년에는 이때 서리가 내려 흉작이 되었다. 풍작때는 1근(600g)에 5,000~6,000원 하던 것이 작년 흉작 때는 25,000원을 호가했다. 올해도 산수유나무에 열매가 적게 달려 흉년의 징조가 있다며 더 비싸질 것 같다고 한다. 만복대까지 등산로가 잘 나있어 왕복 5시간 걸리는 이곳 등산로 입구에는 단체 관광객이 자주 찾는다. IMF여파로 작년에는 손님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마을 가운데는 작은 개울이 있어 소규모 가족단위의 나들이로 좋은 마을이었다. 마을 대부분이 양옥으로 깨끗한 인상을 주는 민박집이 많다. 홍씨와 대화를 마치고 둘러본 상위 마을엔 폐허가 되가는 빈 집들이 있었다. 고가인 듯한 집엔 한때 부자가 살았다고 여겨지는 여러 칸의 방이 있었고 돌담마저 무너져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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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남자들 거의 모두 사망 상위 마을에서 몇 백m를 내려오면 이내 하위 마을을 만난다. 이 마을에서 수소문하여 가장 연세가 드신 서양순(84) 할머니를 만났다. 산동이 고향이신 서 할머니는 69년 전인 15세 때 윗마을인 하위 마을로 시집왔으나 36세 때 할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평생을 아들과 딸들에 의지하며 살았다. 일제 때 하위 마을은 50여 가구가 살았으나 식량이 없어 굶기가 일쑤고 배가 고파 그야말로 죽지못해 살아야했다. 일제 때는 구례장을 다녔고 새벽에 집을 떠나면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두 말 곡식을 이고 큰아들을 업고 다녔더니만 큰아들이 지난해 여름 술이 과해 죽고 말았다. “큰아들 9살 먹어 아버지 죽고 공부도 못시키고 일만 하더니만 술로 죽고 말았지.” 지금은 쓰러져 가는 낡은 집을 지키며 혼자 사시는 서 할머니는 죽은 자식 생각에 끝내 눈물을 글성이셨다. “남편이 없어 목숨이 안죽으니 살아 있었던게지” 하며 지리산속의 고통스러웠던 삶의 이야기를 이어 가셨다. 반란사건 뒤에는 집도 다 타서 없어지고 움막을 짓고 살았다. 만복대 옆 다름재를 넘어 인민군들이 몰려들고 국군과의 큰 전투가 있을 무렵 상위 마을과 마찬가지로 하위 마을의 남자들이 거의 다 죽었다. 하위 마을엔 연세가 많지 않은 할아버지 한 분만이 살고 계셨다. 우연히 내려다본 마당의 댓돌 위에는 뚫어진 검정고무신을 가죽으로 기워 놓은 할머니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한때는 마을 전체가 삼베와 명주베를 짜기도 했다. 오래 전에는 마을까지 맹수가 내려 왔었으나 지금은 동물이 거의 없고 가끔 멧돼지가 내려와 골짜기에 심어 놓은 고구마밭을 파헤친다.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식량을 갖다줘서 먹고 산다는 할머니는 깊은 한숨으로 이야기를 마치셨다. 못난 노인네니 찍지 말라며 한사코 사진찍기를 거부하셨다. 하위 마을에서 내려오다 개울을 건너 다시 다름재쪽으로 올랐다. 포장된 도로가 끝난 곳에 월계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마을 맨 위쪽에는 91년에 지은 산동저수지가 일대 마을의 식수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월계 마을에서는 인근 광의면이 고향으로 6대째 지리산에서 살아온다는 최규옥(崔圭玉·68) 할아버지를 만났다. 구정례(62) 할머니와 사이에 6남매를 두셨다. 30여 년 전 월계 마을은 20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14가구만이 살고 있다. 인근의 상위, 하위 마을과 같이 월계 마을도 흑염소를 키우고 있었고, 관광객을 상대로 고로쇠 채취며 민박 등을 하고 있었다. 일제 때 초등학교 4학년 당시 해방되면서 2년간 한글을 배웠으나 생활곤란으로 월계에 들어오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산골짜기마다 숯을 많이 구워서 동네 앞까지 숯을 실어 나르는 차가 드나들었다. 생활이 어려웠던 마을 사람들은 서로 나르려고 했고 남자는 2포, 여자는 1포씩 나르면 쌀 1되 정도의 값이 생기고 그 돈으로 밀가루를 사서 죽을 끓여 먹었다. 옛날에는 만복대쪽으로 올라 산작약, 오미자, 두룹 등을 따러 다녔으나 지금은 숲이 차서 약초도 안되고 흔했던 고사리밭도 없어졌다. 6.25 전후해서 현재 온천이 있는 중동 마을까지 오르내리며 살았으나 반란군과 토벌대 간의 총성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고, 끝내 다리에 총을 맞아 큰 상처를 남겼다. 6.25 전후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빨치산에 협력했다고 동네사람들을 마을에 모아 놓고는 막대기로 죽어라 하고 패고는 어디론지 끌고갔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 때 최 할아버지의 작은아버지 두 분도 함께 끌려 가셨다. 현재 1,000여 평의 농사를 짓고 계시는 최 할아버지는 92년에 1,600만 원의 가옥 신축자금을 20년 상환 조건으로 융자받아 번듯한 양옥을 지었다. 논농사 외에 흑염소, 한봉, 소 등을 키우며 어려우나마 먹고 살고는 있다고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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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내려와 개, 염소 물어가 월계 마을 떠나 인근의 당동 마을로 향했다. 당동 마을은 온천 마을에서 성삼재로 오르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당동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89세의 김중년(金重年) 할아버지댁을 찾았다. 한적한 집안엔 아무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밭에서 일하고 계신 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방영순(71) 할머니와 함께 밭에서 고추모를 심고 계셨다. 까만 고무신을 신고 계신 할아버지는 고령의 나이답지 않게 정정하셨다. 3대째 당동 마을에서 살아오신다는 김 할아버지는 현재 10여 호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나 산동면에서 원동 마을 다음으로 생긴 아주 오래된 마을이라고 하셨다. 일제 때는 17가구가 살았고, 이 마을의 유명한 산수유나무는 몇 백 년을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못 먹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고 본인 나이는 물론 이름 석자도 모르는 사람이 천지였다. 그나마 돈 있던 사람들은 서당에 다녔지만 극소수뿐이었다. 일제 때는 공출이 심해 논 1마지기에 4가마니가 나면 6, 7가마를 공출하라고 강요했다. 식량을 안내놓는다고 동네 이장을 잡아다 패고 집집마다 다니며 솥뚜껑을 열어 보았다. 식량이 없어 콩깨묵 등을 배급받아 연명해야 했다. 10여 호 되는 부락에 보국대 인원 차출이 나와 2, 3명을 데려가면 서로 안갈려고 심지뽑기를 했다. 김 할아버지는 보국대에 안 끌려가려고 산속에 굴을 파놓고 도망을 다니곤 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제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고, 공출도 큰애기공출, 과부공출 등으로 여자들을 잡아갔고 남자들은 군인으로 끌고 갔다. 해방이 되면서 식량이 없어 대부분 굶다시피하며 풀뿌리 등으로 연명했다. 6.25 전후해서는 이쪽 저쪽의 등살에 밀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당동은 옛부터 당터가 있었다 하여 당동이라 불렀다. 김 할아버지 어릴 때는 마을에 호랑이가 내려와 개, 염소 등을 물어갔고 갖가지 호환이 끊이질 않았다. 이 때 마을 사람들이 쇠로 된 고양이만한 크기의 말을 만들어 당터에 두었다. 쇠말의 머리를 동으로 두면 동쪽에서 오는 호랑이가 끊어진다고 하여 말머리를 자주 돌려두곤 했으나 6.25 때 없어져 버렸다. 그 후 누군가가 와서 금속탐지기로 쇠말을 찾아가지고 가버렸다. 아직도 멧돼지는 내려온다. 워낙 척박한 땅이 많아 논이 될 만한 공간이 없고 밭농사를 주로 해서 콩, 고추 등을 생산한다. 당동은 주위에 산수유나무가 즐비하여 산수유 열매로 생활하고 있었다. 산수유 껍질은 조합이나 장사꾼들이 사가지고 간다. 할아버지 젊었을 때는 여러 가지 약초도 많이 캤으나 지금은 약초 캐는 사람이 없다. 1시간 반이면 성삼재로 오르는 길이 있으나 요사이는 당동에서 성삼재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부터 땅값이 오를 거라는 예상으로 서울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한다. 당동은 몇 가구 되지 않았으나 대부분 최근에 지은 양옥으로 외지인들의 집이라고 한다. 김 할아버지는 자식들이 보내주는 용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하며 마을이 점차 삭막해져 간다고 걱정하고 계셨다. 마을 위 공터에서 좋은 식수가 나와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틈틈이 짓는 밭농사는 서울의 자식들에게 보내준다고 한다. 특별히 고생한 적보다는 평생이 고생이라며 한숨을 쉬신다. 월계 마을 위의 다름재는 전에 운봉장을 보러다니던 길이었는데 워낙 가파른 길이라 천천히 내려오려고 해도 달음질이 된다고 해서 다름재라고 했다 한다. 남원, 구례, 운봉장이 모두 40리씩이어서 모든 장을 골고루 보러 다녔다. 현재 당동은 민박이 두 집 있으나 등산객이 거의 없고 산수유 꽃 피는 때는 사진 찍는 사람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룬다. 당동 마을 주위에도 산수유나무가 무성하고 길섶에는 도심에서 보기힘든 자운영꽃이 만발해 있었다. 김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마치고 인근 논에서 경운기일을 하고 있는 동네아저씨에게 당터자리를 물었으나 당터가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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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철 물맞이객들로 북새통 온천장이 있는 마을로 내려왔다. 서로가 원탕임을 알리는 어지러운 간판이 여관마다 걸려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마을이 온천이 개발되면서 유흥업소가 즐비한 거리로 변하고 있었다. 온천 마을을 떠나 구례에서 남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오르면 잠시 후 오른쪽으로 수락폭포로 오르는 갈림길을 만난다. 이곳에서 좁은 길을 따라 내산리와 원달리를 지나면 수락폭포가 있는 수기리 마을을 만난다. 이 마을 앞의 넓직한 공터에 차를 대놓고 5분여를 오르면 엄청난 굉음과 함께 힘차게 쏟아 붓는 수락폭포를 볼 수 있다. 수락폭포는 쌍계사 윗쪽의 불일폭포와 함께 지리산에서 드문 폭포중의 하나다. 10여m 높이의 수락폭포 옆으로는 폭포 물줄기를 연결하여 물맞이를 할 수 있게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여름 한철엔 물맞이를 하는 할머니들이 신경통에 좋다며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수기리 마을에서 끝나는가 싶은 길을 다시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 폭포 위를 오르면 마지막 마을인 수락 마을로 이어진다. 10여 가구가 드문드문 떨어져 사는 수락 마을에서 맨 위쪽의 외딴집에 사시는 장대섭(長大燮·75) 할아버지를 찾았다. 장 할아버지댁 주위에는 50년생 이상 된다는 대나무가 무성하고 오동나무에는 자주빛 꽃이 만발해 있었다. 인근의 작은 골짜기에선 물소리가 요란하고 포장된 도로의 끝이라 가끔 외지 차가 올라왔다가는 돌아가고 있었다. 부인 곽순예(75) 할머니는 건너편 동산의 밭 가운데 앉아 따사로운 햇볕을 쬐면서 앉아 계셨다. 인적조차 드문 이 깊은 산중에서 혼자서 멀찌감치 앉아 계시는 사연이 궁금했다. 어린 시절 생각에 잠겨 계실까. 51세 된 큰아들과 같이 산다고 하셨다. 수락 마을에서 4대째 살아 오신다고 한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해주 오씨가 난을 피해 들어왔으나 지금은 없고 장, 김, 권, 정의 4개 성씨가 살고 있다. 장 할아버지의 증조부는 효성이 지극하신 분으로 마을엔 효자문과 비석까지 세워져 있다고 한다. 해방 무렵에는 30호가 살았으나 주로 화전으로 감자를 일궜다. 일제 때는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졌으나 6.25 전후 해서 벌목으로 다 베내가고 지금은 잡목만 우거져 있다. 왜정 때 논이 100두락 정도 있었으나 전부 공출 당하고 안남미라고 해서 형편없는 질의 쌀을 배급받았다. 해방 후 간이학교에 2년 간 다닌 것이 교육의 전부였다. 왜정 때는 숯을 많이 구웠다. 나무를 숯굴에다 눕혀놓고 재인 것을 눌굴이라 했고 세워서 굽던 굴을 설굴이라고 했으나, 눌굴은 30년 정도 했고 까다로운 설굴은 3년밖에 하지 못했다. 마을 뒷산은 왜정 때 일본놈이 함락했다고 기세운 몰랑이재라고 불렸다. 어느 날 일본인이 기를 세우려고 산에 올라갔다가 독사에게 물려 죽어 마을 사람들은 독사를 충신이라고 했다. 마을 뒷산으로 연결되는 숙성치를 넘어 30리 되는 남원장을 다녔다. 마을 앞에는 당산나무가 있어 재작년까지 당산제를 지냈으나 IMF 이후에는 당산제조차 지내지 못하고 있다. 장 할아버지 집 앞에는 왜정 때까지 심었다는 논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잡초가 무성한 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객지 사람들이 사간다고 했다며 주변의 대나무를 잘라서 다듬고 있는 할아버지와 대나무 더미에 앉아 장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하얗고 긴 수염의 장 할아버지 손은 오랜 세월 긴 풍상에 너무도 망가져 있었다. 하산길에 다시 수락폭포의 물소리를 뒤로 하며 귀경길에 올랐다. 지리산은 언제나 묵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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