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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역사

치유농업사 2009. 11. 15. 07:13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남쪽 끝자락에서 훨훨 일어난 거대한 산괴이다.  서쪽으로는 전남 구례군 황전면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전북 남원시에 접하며, 동북쪽으로 경남 함양군과 산청군, 동남쪽으로는 경남 하동군에 접하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대의 단일 산악지대이다.지리산은 거대하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덕천강과 엄천강, 횡천강을 이루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 재가 15곳에 이른다. 또 지리산에서 솟는 샘과 이름을 갖고 있는 전망대, 바위의 숫자만도 각각 50여 개, 마야고와 반야도사, 호야와 연진 등의 설화에 이상향과 신선의 전설을 안고 있는 지리산, 천왕봉 일출, 반야봉 낙조, 세석의 철쭉, 벽소령 달밤, 피아골 단풍, 노고단 운해, 연하봉 설경, 불일폭포, 칠선계곡, 섬진강의 맑은 물로 대표되는 지리산10경을 들먹이지 않고도, 한때 지리산에 350여 군데나 절과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 지리산은 그 자체로서 이미 산으로 충분하다. 지리산은 아무 수식이 필요 없는 산이다.

 국가적인 대제사가 거행되던 노고단 -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리산은 신라때부터 남악(南岳)으로 불리며 매년 봄,가을이면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장소였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신으로 모시던 곳이 바로 노고단이며 노고단(老姑壇)의 이름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노고단이나 남악사가 아닌 천왕봉에서 고려시조인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모시는 것으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국가적 제사의 전통은 조선을 거쳐 일제시대에 중지되었다가 현재까지도 남악사 약수제 등으로 남아있다.  .

 삼한시대 달궁계곡 일원은 삼한시대 마한의 왕조가 망명하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온조왕 27년(서기 9년)에 마한왕조가 멸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34년(서기 16년)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을 토벌한 이야기가 나오고, 신라 탈해왕 5년(서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가 항복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한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3세기 후반 마한세력이 중국과 교류했다고 나오고, 4세기에는 마한의 일부세력이 서해안에 진출했다는 기록도 있는 걸로 보아 부족국가 마한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달궁마을에 쫓겨와 궁전을 짓고 살았다는 마한의 부족국가가 바로 이들무리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설 - 김명수의 '지리산'중에서].


 반란의 산
- 지리산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빨치산과 반란군일 것이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한달이상 노고단의 외국인 별장촌은 반란군 김지회의 근거지였다.   반란군이 물러가고 난 후 국군 토벌대가 다시 들어와 이곳이 또다시 빨치산 거점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태워 버렸다.  노고단고원이 황폐해진 직접적인 이유이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노고단 산장 서측에는 흉물스런 별장촌의 잔해가 남아있고, 외국인 별장촌은 노고단 남쪽 왕시루봉 기슭으로 옮겨져 다시 세워졌다.   6,25 이후 빨치산 잔당들은 또다시 지리산으로 모여들었고, 이는 국군 토벌대의 무차별 포격, 방화로 이어지고 만다.  피아골 산장터에서 한트럭분 이상의 인골(빨치산의 것으로 추정)이 나왔다는 사실은 얼마나 토벌작전이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에 불과하다.  1952년 빨치산 대몰살의 현장이었던 대성골, 거림골, 빗점골, 의신부락등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오늘날까지도 대성골의 숨은 골짜기에서 인골이 종종 목격되곤 한다.  당시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죄없는 양민이 국군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역사로 남아있다.  

 지리산은 빨치산 토벌대의 무자비한 토벌과 이를 빌미로한 산악도로의 건설로 이중의 아픔을 겪어왔다.  '빈대 한 마리 잡으려 초가삼간 태운다'더니 빨치산에 한번 덴 권력자들은 지리산의 서북능선을 주능선과 뚝 떼어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노고단 턱밑을 깎아 건설한 성삼재 861번 지방도로가 그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능선마저 반으로 갈라 놓으려는 모략이 벽소령 관광도로 포장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나 다행히 벽소령은 포장되지 않고 남아있게 되었다. 서북능선은 만복대 아래서 정령치도로에 잘리워 지리산의 섬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리산에 담겨 있는 사연]

지리산에 담겨 있는 사연, 사연들이 우리의 한 많은 역사라고 할 만큼 수난과 질곡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찍이 마한, 진한을 시작으로 가야와 백제, 신라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을 국경으로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으며, 고려 때는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려야 했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참상을 겪어야 했다.

또한 민초들의 단내 나는 숨소리가 요동쳤던 동학혁명과 진주농민운동이 지리산에 와서 마지막 거친 숨을 토해냈고,

해방 후에는 빨치산과 토벌대의 피가 계곡과 능선을 붉게 물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리산은 말이 없다. 다만 1천 5백여년의 세월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보여 줄 뿐이다.

지리산은 민족 신앙의 영지다. 예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던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려왔음에서나, 성모사(聖母祠)와 남악사(南岳祠)의 존재에서도 지리산은 성스러운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시사철 구름 위에 떠 있는 고봉 준령마다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있고, 깊은 계곡마다 신령스런 기운이 샘솟는 지리산,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민족 정신이 상처를 입을 때마다 지리산이 먼저 울어 우리를 지켜주었으며, 국운을 열어주는 천지 개벽의 시작이 지리산에서 비롯된다"라고 말하는가 보다. 그러나 이런 신비로움을 구태여 동원하지 않아도 천왕봉에 새겨져 있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는 글귀처럼 지리산은 우리 모두의 산임을 알 수 있다.

지리산은 수많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들에게 삶터를 제공해주는 생명의 산이기도 하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에서 마치 양손을 벌리듯 15개의 남북으로 흘러내린 능선과 골짜기에는 245종의 목본(木本)식물과 579종의초본(草本)식물, 15과 41종의 포유류와 39과 165종의 조류, 215종의 곤충류가 자라고 있다.

또한 경남 산청군의 덕천강을 발원시키고, 경호강을 더해 남강과 낙동강으로 흘러 보내고, 섬진강에도 강물을 보태 경상도와 전라도에 공평하게 삶터를 나눠주고 있다. 인류 문명이 강에서 비롯되었다면 강은 산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산(山)은 인류문명의 모태다.

지리산은 경남의 산청, 함양, 하동군과 전북의 남원시, 전남의 구례군에 걸쳐 있으면서 오만 가지 삶을 아우르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 20여 개가 펼치는 산자락 둘레만도 800여 리에 이르는 산답게 많은 시인 묵객들의 작품을 낳기도 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치遠)을 시작으로 고려 때는 이인로(李仁老), 조선시대에는 서경덕(徐敬德), 김종직(金宗直),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남명, 서산(西山)대사 등이 지리산에 올랐다가 느낀 바를 작품으로 남겼다.

고운은 지리산 곳곳에 글과 글씨를 남기고 가야산에서 영원히 입산하며 '스님이여 산 좋다 말씀마오/이렇게 좋은 산을 낸들 어이 떠나겠소/뒷날 내 자취 찾아 보시구려/한번 들면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니'를 읊고는 약속대로 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또 이인로는 고려 무신정권 아래서 참담한 생활을 하다 이상세계를 찾아 지리산에 들어 '지나는 곳마다 선경이 아닌 곳이 없구나/천암(千巖)이 다투어 솟아 있고/온갖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소리 내어 흐르는데/대나무 울타리와 떼를 입힌 집들이/복숭화꽃 살구꽃에 어리어/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듯 하구나'라고 노래했다.

화담은 반야봉에 올랐다가 '지리산이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올라가 보매 마음의 눈이 끝없이 넓어지네/바위는 장난하는 듯 솟아 봉우리를 이루니/아득한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랴/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을 일으키고/하늘에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산은 나를 위해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니/천리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인가' 라는 시를 읊고는 즐거워 했다고 『화담집』에 기록하고 있다.

점필재와 그의 제자 김일손은 각각 17년의 간격으로 지리산을 오르면서, 점필재는『유두류록(流頭流錄)』을, 김일손은 『속두류록(續頭流錄)을 남겼다. 기행문의 백미로 꼽히는 두 작품에서는 당시 선비들의 풍류와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읽을 수 있다.

김일손은 정여창과 지금의 중산리를 거쳐 천왕봉으로 올랐는데 천왕봉 일출을 보면서 '햇살에 비친 계곡과 하늘이 온통 구리쇠를 갈아 뿌린 것 같구나/ 세상의 모든 것이 차츰 눈에 들어오는데 대지의 모든 것이 개미집이요/지렁이가 흙을 물어 쌓은 듯하다'고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천왕일출 감상을 적고 있다. 정여창은 천왕봉을 넘어 화개 땅에 이르러서야 '바람에 버들잎 가볍게 나부끼고/사월의 화개 땅엔 누런 보리 물결/두류산 천만겹 다 보고 나서/한 척의 큰 배로 큰 강 따라 흘러라' 라며 지리산을 보고 난 뒤의 포만감을 노래했다.

천왕봉에 지금의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기 전에는 '경남인의 기상'이 있었고, 그전에는 남명의 '하늘이 울어도 천왕봉은 울리지 않는다'는 뜻의 '만고천왕봉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天鳴猶不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서산대사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과 더불어 지리산을 평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엄한 산이라 했다.

지리산은 작품의 무대이기도 했다. 『삼국유사』에서부터 지리산을 무대로 한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중세 리얼리즘의 대표작과 판소리를 낳고, 최근에 들어서는 분단의 역사를 기록한 작품들이 지리산을 배경으로 나왔다.

매월당(每月堂) 김시습(金時習)은『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에서 지리산자락에 있는 전북 남원 만복사를 배경으로 허황된 듯하지만 남자 주인공 양생과 여자 주인공 최낭자의 사랑을 그렸다.

조선 중기에는 판소리문학의 대표작들인 『춘향전』과 『흥부전』, 『변강쇠타령』등이 지리산 자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몰락한 양반의 손자 석이와 소작인의 딸 순이의 비극적인 삶을 내용으로 하는 황순원(黃順元)의 『잃어버린 사람들』을 비롯해 박경리(朴景利)의 대하소설 『토지』와 김동리(金東里)의 『역마』,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모두 산으로 갔어요…' 로 시작하는 신동엽(申東曄)시인의 『진달래 산천』, 뱀사골 마뜰마을을 소재로 한 오찬식(吳贊植)의 『마뜰』, 문순태(文洵泰)의 『피아골』과 『철쭉제』,김주영(金周榮)의 『천둥소리』, 이병주(李炳住)의 『지리산』,이태(李泰)의 『남부군』,조정래(趙廷來)의 『태백산맥』등의 작품들이 지리산을 무대로 신분차이로 인한 갈등에서부터 신·구세대들간의 갈등, 이념의 갈등들이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고통, 사랑과 분노로 뒤엉키는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지리산은 거대하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덕천강과 엄천강, 횡천강을 이루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 재가 15곳에 이른다. 또 지리산에서 솟는 샘과 이름을 갖고 있는 전망대, 바위의 숫자만도 각각 50여 개, 마야고와 반야도사, 호야와 연진 등의 설화에 이상향과 신선의 전설을 안고 있는 지리산, 천왕봉 일출, 반야봉 낙조, 세석의 철쭉, 벽소령 달밤, 피아골 단풍, 노고단 운해, 연하봉 설경, 불일폭포, 칠선계곡, 섬진강의 맑은 물로 대표되는 지리산10경을 들먹이지 않고도, 한때 지리산에 350여 군데나 절과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 국보만도 7점, 보물 26점에 지방문화재와 주요 사적지, 민속자료까지 헤아리지 않아도 지리산은 그 자체로서 이미 산으로 충분하다. 지리산은 아무 수식이 필요 없는 산이다 .